개신교회가 잃어버린 기억: '수도원의 역사' 서평

최형걸, 『수도원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066 (파주: 살림, 2015)

“수도원”(Monastery)은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 축을 감당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개신교에서는 익숙하지 않다. 필자가 장로교신학대학교에 부임해 ‘수도원’관련 과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수도원의 역사와 영성>과목을 열어보았는데, 수강생이 없어 폐강된 적이 있을 정도다. 기껏해야, 진한 회색이나 검은색의 투니카(Tunica)를 입은 수도사들이 어두침침한 성채 같은 곳에서 촛불만 켠 채 공동으로 신앙생활을 곳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같은 종교개혁가들이 수도원을 척결해야 할 중세의 잔재로 인식해, 수도원들을 폐쇄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형걸의 『수도원의 역사』는 개신교 전통에서 그 동안 간과되어온 수도원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수도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절대자 하나님이 가진 진정한 평안과 안식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언행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적인 질서에 들어가고자 했고, 오늘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 그것을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5쪽)

이런 수도사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는 곳을 수도원이었다. 이어 저자는 1,800년 기독교 수도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과사건들을 간략하게 연대기적으로 언급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기독교 수도원 운동은 처음부터 2가지 형태로 시작되었다. 하나는 성 안토니오스(St. Antonios, ?~356)을 필두로 하는 초막이나 동굴 등에서 홀로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기도와 묵상에 집중하는 독수도전통(獨修道傳統)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원시 공동체(사도행전 4장)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함께 모여 수도생활을 하는 회수도전통(會修道傳統)이다. 특히, 파코미오스(Pachomios, ?~347)의 의해 시작된 회수도회는 효율적인 수도공동체 운영과 유지를 위한 규칙들을 만들어 운영했다. 이후 4세기의 카이사레아의 바질레이오스(Basil of Caesarea, c. 329-379)도 자신이 운영하는 수도원을 위해 아스케티콘(Asketicon)이라 불리는『수도규칙』을 만들었다. 여기엔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규범들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함의하는 신학적인 의미까지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 바질레오스는 후대의 신학자들로부터 회수도원운동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동편에서 시작된 수도운동은, 수도규칙들과 함께 다양한 경로들을 거쳐 로마, 갈리아, 마르세유, 아일랜드를 포함한 서유럽으로 펴져 나갔다. 서방 수도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토(Benedict of Nursia, c. 480-547)는 당시 서유럽에 전파된 수도 규칙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수도규칙인 『베네딕토 수도규칙』을 만들었다. (사진은 2차세계대전에 폭격으로 어려움을 겪은 베네딕토수도원의 본산 몬테카를로 수도원전경)

여기서는 수도생활을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생활”(73장)이라고 정의하면서, 수도사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수도규칙에 대한 준수, 가난, 순결(=독신), 순종을 명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도사가 된 이들은 기도와 명상뿐 아니라, 일정한 시간의 노동과 공부, 그리고 재산의 공유와 청빈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베네딕토 수도규칙』은 이후 9세기 루이 황제(Ludwig, r. 814-840)에 의해 “유럽 수도원의 단일화된 공식 규칙(una consuetudo monastica)”으로 제정되면서 중세 수도원을 대표하는 수도규칙으로 자리매김한다.


수도원이 교황제과 함께 중세 유럽사회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잡자, 수많은 물질과 재산이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재물과 권력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중세 수도원도 그렇게 되었다. 많은 재물을 축적해 비대해진 수도원을, 정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재산 증식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는 중세 수도원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세 교회를 타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후 클루니(Order of Cluny)와 시토수도회(Cistercians) 처럼 수도운동의 본질을 회복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개혁운동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운동을 통해 기사계급이 신흥 계급으로 등장하였고, 당시의 무역과 상업의 활성화를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이나 수공업들이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시민계급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들 시민계급의 일부는 성직자 계급이나 전통교회가 만들어낸 교리나 신학, 그리고 형식화된 성사나 예전에 도전하면서 주체적인—교회나 성직자를 통하지 않는—신앙생활 추구하였다. 카타리(Cathari)파나 왈도(Waldo)파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권 밖의 경건운동은, 당시 가톨릭 교회가 보기에는 ‘이단’에 불과하였다. 중세교회는 이들을 무력으로 초토화시키기도 했지만, 다시 카톨릭의 올바른 신앙으로 돌이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중세교회안에서는 특수수도회가 조직되는데, 바로 도미니크 수도회(Ordo fratrum Praedicatorum, O.P)다. 이 수도회는 제도밖 경건주의 이단에 빠진 이들을 교화시키는 것이었기에, 소속 수도사들은 기본적으로 신학과 학문에 관심이 컸다. 이런 영향으로 도미니크 수도회는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 1225-1274)와 같은 탁월한 신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림 성 도미니크)


중세 교회는 교황 클레멘트 5세 (Clement V, r. 1305-1314)가 로마에서 프랑스의 남부 아비뇽(Avignon)으로 교황청을 옮긴 “아비뇽 유수” 거치면서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중세교회의 영향력 안에 있던 수도원도 그 영향을 피해갈 수 없었고 점점 쇠락하였다. 특히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후에는 더욱 심해졌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대열에 참여한 지역들은 중세교회의 잔재로 여겨 많은 수도원을 폐쇄한 후, 수도사들도 추방했다. 설령 겨우 살아남은 수도원들이나 수도사들도,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으로 인해 이전만큼 활발하게 활동할 수 없었다.


한편, 종교개혁의 폭풍가운데서 16세기 카톨릭 내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가 등장하였는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예수회(Societas Iesu)이다.

예수회는 가난, 순결, 순정을 모토로 삼은 이전 수도원들과는 달리, 가난과 순결에 더하여 순례와 영혼구원을 추가했다. 그리고 수도생활에서 비본절적인 것들—수도자 복장, 건물 등—을 시대에 맞게 과감하게 개혁하였다.

이런 예수회의 노력으로 16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인도를 거쳐서 중국과 일본, 결국에는 한국까지 올 수 있었다.


이상으로 최형걸의 『수도원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집트에서 시작된 기독교 수도원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선 필자는 1,800년의 수도원의 역사를 94쪽의 문고판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최형걸님의 필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긴 수도원의 역사를 이렇게 간략히 정리하다니...”. 물론 요약정리형식이기 때문에, 수도원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원의 역사를 처음 접하거나 수도원의 역사를 한 눈에 보길 원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소개서다. 아무쪼록 이 책은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생경한 현 시대상황에서 신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서양의 수도운동이라는 언덕을 넘어가려는 이들에게 좋은 동반자요, 유익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

 

리뷰어 최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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