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겨 사는 현대인
90년대 말, 토론토에서 신학 공부를 한 적이 있다. 20년도 넘은 오래 전 일이지만, 토론토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은 봄이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날의 토론토는 형형색색의 화원으로 변한다. 캐나다인의 봄맞이는 집 마당 구석구석 꽃을 심는 일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단연 튤립이었다. 원색의 자태를 뽐내며 봄을 가득 메웠던 튤립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봄이 너무 짧아 튤립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짧았다. 봄을 좀 늘일 수는 없을까 하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신학 공부하면서 몇 백 페이지나 되는 두툼한 원서를 읽고 수십 페이지짜리 에세이를 영어로 써 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잠을 줄여가면서 공부해도 시간은 늘 부족했다. 시간에 대한 생각이 또 들었다. “하루가 30시간, 일주일이 10일이면 좋겠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시간 활용(time management)’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현대인들은 모두 시간에 쫓겨 산다. 과거에 대한 후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현재를 산다. 인간의 이러한 불안함 때문일까, 우리 주변 문화를 살펴보면 시간에 대한 관심을 발견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 : 과학의 눈으로 시간을 바라보라
최근에 <인터스텔라Interstellar>(2014), <인셉션 Inception>(2010), <덩케르크 Dunkirk>(2017) 등 많은 화제작을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2020년 영화 <TENET>를 보았다. 놀란은 장르에 상관없이 시간에 대한 비범한 시각을 영화 속 장치로 두는 독특한 연출로 알려져 있다. <테넷TENET>은 놀란 감독의 시간에 대한 생각의 집대성으로 6년간 준비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놀란의 영화는 일반 오락 영화의 범주를 많이 벗어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따라가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고, 평론가들 마저 <테넷> 같은 영화는 한번 보고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테넷>의 특징은 ‘시간의 역전 (inversion)’이다. 시간을 역으로 돌려 과거로 갈 수 있고, 시간보다 앞서서 미래로도 갈 수 있다. 이런 인버전 기술을 갖고 있는 악당이 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 한다. 주인공들이 과거와 미래로 다니면서 그것을 막아낸다는 게 기본적인 줄거리다. 특히 인버전 된 장면들의 구체적인 의미나 배우들의 대사를 단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런 장면들을 만들어내는 상상력과 기술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이나,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중원의 고수들이 등장하는 중국 무협영화를 구경하는 관객들은 부담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장면들은 CG인 것도 다 알고, 판타지인 것도 인정하고, 관람의 목적도 단순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놀란의 작품들은 멋지고 기가 막힌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의 역전’을 채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자를 등장시켜서 이런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넣고 있다. 흥미를 유발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과학의 눈으로 시간을 바라보라는 세계관을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담스럽고 어렵다.
시간, 넘사벽인가 영원한가
창세이래 인간은 시간에 굴복해왔다. 차를 만들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고, 지구 밖 행성까지도 여행할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 해저를 탐험하며 남극과 북극에도 연구소를 차렸다. 인류는 짧은 시간에 가히 놀랄만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인간의 기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너머 우주로까지 계속 확장해가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직 정복하지는 못한 것이 있다. 시간이다. 세상을 호령하던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했지만 예외없이 모두 시간 앞에서 굴복하고 지금은 역사책에 남아 있을 뿐이다.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소설이 나오고 영화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이론과 가설이 세워지지만, 시간은 인간이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다. 시간에 대한 갈망은 최신 유행하는 이슈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가 했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eternity)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사실 시간에 대한 불안함의 뿌리는 죽음에 있다. 현재는 살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삶이 끝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원하지 않는 끝을 만나지 않기 위해 과거로 가고 미래로 점프해 보려는 거다. ‘TENET’이라는 단어는 앞뒤 어느 쪽에서 읽어도 같은 말이 되는 회문(回文, palindrome)이다. 만약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끝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과거와 미래를 애써 다니다가 테넷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그런데, 영원(Eternity)이란 것이 있고, 그것을 가슴에 담고 사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시간에서 자유롭다. 그렇게 영원을 사모하는 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16-18)
들국화의 이런 노래가 생각난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난 노래할 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행진, 행진하는 거야.”
과거는 힘들었고, 미래가 항상 밝을 수는 없어도, 우리는 현재 진행형으로 매일을 행진하듯 살아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겸손하며, 영원의 소망이라는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진정 자유로운 자다/ 주진규
저도 <테넷> 아직 못봤는데 영화가 궁금해지는 리뷰였습니다. 튤립에서 시작해서 들국화로 마무리되는 꽃이 시간 여행을 둘러싼 글이네요. ^^
영화를 보지 않고 글을 읽다보니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지는 듯 합니다. 시간의 흐름과 역전, 상상만으로도 쉽지 않은 그것을 영상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사역자의 헌신이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야 할까 고민해 보게 됩니다.
시간이라는 주제는 참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테넷을 보면서 난해의 강에 빠졌었죠 ㅎㅎ 테넷에서 들국화로 이어지네요! 문화라는게 참 놀랍습니다!
들국화.....주목사님과 통하는게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 직관적으로 가지는 강박증, 일종의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운명'에 지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발견합니다. 이점에서 기독교신앙이 말하는 '일직선적 관점' 시작과 끝이 있고, 또 그 끝에 창조주의 온전한 회복이 기다린다는 약속은, 팔자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강력한 소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