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의 핫블로거 울산대학 이정훈 교수의 <교회 어떻게 개혁하나요> 유튜브 영상은 한국교회의 개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솔깃한 주제를 다룬다.
내용
이정훈 교수는 마태복음 5장 14절(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를 본문으로 두고, 교회개혁을 위해서는 개인부터 성경적 세계관으로 삶을 세팅해야한다며 강의를 시작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적 리뷰를 시도하는데 실패의 예로 중세 카톨릭의 세계관을 언급한다. 중세 카톨릭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세상 위에 군림하였다. 이에 반해 종교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세상,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이 평등하게 있다’는 성경적 세계관을 선포했다. 여기서 그는 한국교회가 변질되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금지해왔음을 비판한다. 그에겐 종교와 정치 곧 신앙과 삶의 이야기를 분리시키는게 세속화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사실 변질되기 전의 한국교회 덕분에 세워진 것이고, 그 증거로 헌법이 인정하는 신앙의 자유는 종교개혁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겉으로는 안정적인 규모를 가진 한국교회의 교세를 제시한다.
이 교수는 국가에 있어서 교회와 체제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대런 에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 나오는 애리조나주 노갈레스 이야기를 인용한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같은 동네였지만 현재는 미국과 멕시코로 국경이 나뉘어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나누어진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미국에 속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교육수준 및 위생상태, 치안 등의 영역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며 그 이유를 미국교회의 영향과 교회를 허락하는 체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도에 대해서도 겉으로 보이는 심오학 철학 뒤에는 철저한 카스트 제도의 문제에 갇힌 후진적 현실을 지적했다. 유교사상과 신분제에 사로잡혀있던 조선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이 교수는 우리가 신앙과 인권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번듯한 교회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예배할 수 있게 해준 이 체제에 감사해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표현한다. 교회개혁은 이 체제를 인정하면서 개인이 회심하여 하나님의 도구로써 이 세상을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게 핵심이라는 주장으로 강의는 마무리된다.
도전과 고민들
이정훈 교수의 강의 내용 중에서 공감되는 부분들도 있었다. 교회만 하나님께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영역에 미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커다란 은혜이고 그분의 도구로써 참여한다는 지적도 도전적이었다.
동시에 그가 인용한 본문이 과연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특히 그가 계속 주장한 ‘성경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의 도구임을 인정해야된다는 신학적인 명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조금 더 귀를 귀울였어야했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이고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한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왜 마태복음을 선택한 것인지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마태복음은 교회라는 단어를 제시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먼저 선포하고 제시한 것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이다. 예수님은 교회 이전에 천국을 알려주셨고, 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경험하며 또한 준비시키라는 말씀을 승천하시면서 전달하셨다.
교회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따라서 한국교회 개혁은 천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천국
우선 마태복음 5장 14절 본문을 보면, 너희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 비유한다. 빛의 특성상 그들은 스스로를 감추려고 해도 감추어지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어두운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본문이 제자들에게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빛이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가 신자답기 위해서 굳이 다른 행동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불신자와 구분된다는 뜻이다. 구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천국’ 복음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여기에 어울리는 삶의 모습에 대한 도전이다. 그렇다면 천국이란 무엇인가? 답을 알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의 시작으로 돌아가야한다.
마태복음은 1-2장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이어지는 3장부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 그리고 요한의 체포 이후 시작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천국 복음을 이야기의 앞자리에 둔다. 그만큼 천국이 기독교와 교회에 필수적인 주제임을 알 수 있다. 이후 5-7장은 산상수훈이라는 하나의 단락으로 구분된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이 4장 17절부터 시작한 천국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과 해설이 등장한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5장 14절을 본문으로 정했으면 마태복음의 천국론을 가지고 교회개혁의 방향성과 방법을 제시해야했음을 알게 된다.
산상수훈에 따르면 천국은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찬양과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 자 곧 마음 속에서 진실로 하나님만 갈구하고 그분의 도우심만 원하는 자들의 것이라 언급된다. 뒤이어 나오는 천국 복음의 또 다른 대상자들 역시 상황이 어떠하든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받는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이 말하는 개혁의 정신도, 천국 복음이 말하듯이, 우리의 상태와 각오가 제자리에 있는지 자꾸 묻는다.
이어지는 5장 후반부는 천국에서의 실제 행동 양식을 설명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노하지 말고, 간음하거나 맹세하지도 말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도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구제함은 은밀하게 하고, 외식은 하지 말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과연 잘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인 7장 13절 이하는 이렇게 높은 기준이 제시된 이유를 말해준다. 천국의 기준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기준과 아예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 점에서 신자의 삶이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고난과 갈등의 과정이 될것임을 암시한다.
신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며 박해받을 다짐과 운명을 가지는 존재다.
철저한 계급 사회 속에서 노예로 태어났다면 사는 것보다 죽는게 낫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신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고 감내하도록 요구받는다. 이것은 신앙의 자유와 인권보장 문제도 포함된다. 이런 것이 있다면 감사해야 하겠지만 때로는 이런 환경이 도리어 우리를 천국 백성처럼 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혜의 부산물을 은혜와 동일시 말아야...
나는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에 속한 사람은 아니지만, 민주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다수의 목소리와 자본의 논리가 천국 복음 곧 신앙과 교회의 본질을 흔들 수 있음을 자주 목격한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체제의 안정감, 신앙과 인권의 자유라는 아름답게 묘사된 포장지가 결코 천국과 동일시 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때다.
결론
교회개혁은 이 유튜브 클립이 말한 것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성도들은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살아야한다. 이를 위해 산상수훈이 말하는 천국 백성처럼 산다면 빛과 어둠처럼 자연스럽게 세상과 구분이 될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모습에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체제의 안정성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천국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체제와 환경을 위해 붙들고 싸워야하는게 아니라, 천국 그 자체를 위해 살아야하며 교회는 언제나 그러한 방향으로 개혁되어야한다.
리뷰어 김찬양님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쉬지않고 따라온 목회자 훈련길에서 지금, 더 넓은 시야를 키우는 삶의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아멘! 선으로 악을 이기는 넉넉한 마음으로 아시안 혐오의 벽을 허물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읋
저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천국 복음과 등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구 사회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경제적 풍요로움과 체제의 안정이라는 복을 누리고 있지만, 축복은 감사의 제목이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동일시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귀한 분석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