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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하는 북리뷰: “용기있는 기독교”의 데이비드 웰즈

최종 수정일: 2021년 4월 28일



시작하는 말

웰즈는 보수적이면서 급진적이다. 보수를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원리를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정말 보수적이다. 그러나 오순절계까지 포함하는 초교파성격과 성경무오성을 양손에 들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일반인의 반찬처럼 되어버린 뉴잉글랜드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온 그의 강단은, 반시대적이란 면에서 혁명적이다.


그의 책 ‘용기있는 기독교’는 그의 보수성과 혁명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 교회가 이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업화와 문화적 타협에 대해 누구보다 일갈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보수기독교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친자본주의 경향은,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비정통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웰즈는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이들에 못지 않게 비판적이다. 그의 출발선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 계시 중심의 방법론, 전통신학의 회복 열정이다. 보수교회들이 자기 뿌리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철저하고 불편한 비판의 이유를 찾아낸다.


때문에 웰스는 상업화에 찌든 교회나, 편리한 교회생활이나 원하는 성도나, 자기 전통에 안주하는 교단에서는 별로 환영 받지 못한다. 여기서 책이란 매체는 매우 매력적인 도구가 된다. 책을 통해 조용히 혁명(?!)을 준비하는 이들을 준비시키는 숨은 활동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현재는 이런 영향력이 더 간절하다. 교회의 사유화가 가져온 세습, 정의에 눈을 감은 권력과 유착, 자기 절제를 잊어버린 재정 운영, 거기에 가장 연약한 자들을 착취하는 성학대까지… 다양한 진단이 있지만, 그에 따르면 모두 ‘성경적 전통신앙’에서의 멀어진 결과다. 한국에서는 부흥과 개혁사가 출간한 4부작 ‘신학실종: 왜 복음주의가 세속화 되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세상의 문화에 포로 된 복음주의 교회를 구출하라’, ‘윤리실종’ ‘위대하신 그리스도’을 통해 오래전부터 소개되어왔고, 한국 안에서 교회 갱신에 관한 여러 비슷한 책들의 모델이 되어왔다.


‘용기 있는 기독교’(개정판)은 4부작에 대한 단권짜리 총정리이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해를 맞아 종교개혁주의적 유산의 회복을 부르짖는 광야의 목소리다. 동시에 1950년이후 성공신화를 만들어 온 ‘신복음주의’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며, 그 한복판에서 싸워온 노학자의 영적 고백이자 교회를 향한 호소이기도 하다.


문을 열면 다람쥐가 뛰어들어올 것 같은 고든콘웰 신학교 도서관 지하층 연구실에서 웰즈를 만났다.


‘용기 있는 기독교’(개정판)은 4부작에 대한 단권짜리 총정리이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해를 맞아 종교개혁주의적 유산의 회복을 부르짖는 광야의 목소리다. 동시에 1950년이후 성공신화를 만들어 온 ‘신복음주의’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며, 그 한복판에서 싸워온 노학자의 영적 고백이자 교회를 향한 호소..
 

김석원: 한때는 자랑스런 이름표처럼 서로가 달고 다니던, ‘복음주의’란 이름이 이제는 하나의 그룹으로서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비판이 많다. 이 책은 대신 ‘프로테스탄트 (개신교가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음을 잘 드러내는 영어명칭) ’란 명칭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 자체는 카톨릭과의 갈등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복음주의 안에서 조차 카톨릭과 교류하는 것을 ‘쿨’하게 여기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이런 인기가 없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웰즈: 내 이야기는 미국 기독교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상황이 다를 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영미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동적인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연대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 헤럴드 오캔카,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프란시스 쉐퍼 같은 지도자들은, 핵심교리 외의 다른 문제로 중요한 협력이 방해 받아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차적인 이슈 아니라 ‘모든’ 신학적 이슈에 무관심하기 시작했다. 이단의 침투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성경적 핵심교리가 주변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대신 다른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신학 자체도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꼬집어 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복음주의는 사람마다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분화가 심화되면서,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로마카톨릭, 성공회의 고교회주의, 동방정교회 등으로 옮겨가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같다. 이것은 ‘발전’이 아니라 ‘문제’다. 이제 ..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정리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을 회복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칭을 쓰자고 것이다.

김석원: 인류에서 기독교는 주변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로 항상 씨름해 왔다. 목록을 만들면 헬라철학, 중세의 국가권력, 근대의 계몽주의,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 까지... 이 책에서 당신은 교회가 문화에 반응한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웰즈: 평가 대상을 내가 속한 서구교회에 좁힐 필요가 있다. 인류역사를 보면 교회는 항상 적대적인 세력과 사상들과 씨름 해 왔다. 물론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면도 있다. 현대 문화는 우리의 삶에 점점 깊이 침투해 영향을 미치고, 기독교 신앙과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 쪽에서는 항상 그랬었지 수도 있지만,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이것이 우리의 삶, 내 자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도 모르고 지나친다. (옆의 사진은 그의 강의 모습)

이점에서 현재 우리가 얻을 교훈은 성경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인생의 가장 시험은 ‘세상’으로 넘어지게 만드는 힘들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어떻게 계속 신실한 사람으로 남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로 정의할 있다. 성경적인 표현을 쓰자면, 죄가 일반이 되고 의가 이상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만드는 현대 문화의 모든 요소들이 ‘세상’인 셈이다.



김석원: ‘용기있는 기독교인’ 개정판을 보면 1950년이후 복음주의의 발전과정을 세단계로 나누었다. 초기 복음주의의 개척자들을 가리키는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의 시대’, 이후 윌로우크릭과 세들백으로 대표되는 ‘마케팅교회시대’, 최근의 ‘이머징교회운동’이다. 그러나 마케팅이후 시대부터는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과 주로 멀어져 갔다고 평가하는 데 그 이유는?


웰즈: 책에서 설명했던 것은 복음주의가 내부에서 어떻게 변이되어 왔고 이를 통해 복음주의 분화가 일어났는 지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도 이제는 과거에나 통용된다. 오늘날 (최종단계로 내가 분석한) 이머징교회운동은 이미 공중분해 되어 버렸다. 기독교 신앙을 ‘소비자’에 팔아야 물건으로 취급하며 교회성장을 추구했던 ‘마케팅’교회들은 자리 정리 과정을 거치는 같다. 이 운동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신앙의 본질과 요구를 희석시키는 일을 왔다. 우리에게 이런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김석원: 이 책은 어떤 경우에도 신학보다 문화를 먼저 앞세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대사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세상 문화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세상 문화와 대화하는 모습이 세상 문화에 흡수되는 식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특히 교회사역에서는 무엇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웰즈: 문화는 교회가 나가야 방향의 기준이 없다. 단지 교회가 씨름해야 환경일 뿐이다. 교회의 어젠다와 메시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한다. 세상에 빠지거나, 세상과 등을 돌리는 식으로 문화에 휘둘려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좁은 의미의 복음메시지가 아니라, 좀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복음은 신앙생활 전체의 길잡이이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접하는 진리의 전부가 아니다. 성경이 (복음을 상징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복음은 가장 단순한 사람도 이해할 만큼 단순하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만큼 심오하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의 두려울 만큼 거룩하심, 사랑의 깊이, 그리스도의 자기를 낮추시는 겸손과 고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정복하심과 그의 놀라우신 은혜를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유치한 마케팅 전략으로 전달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석원: 이 책에서는 교회의 마케팅모델 내부에 잠재된 모순을 잘 지적한다. 특히 세계적으로도 예외적인 미국의 물질적 풍요함을 못누리는 세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비롯한 많은 세계 교회들이 여전히 미국식 마케팅 모델을 쫓으며 교회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 내의 반성과 경험이 이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웰즈: 누구나 교회의 성장을 원한다. 그러나 성장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성장은 숫자 아니라 영적 성숙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되어 있다. 교회성장은 외적 아니라 내적인 성장이어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매일 더하더라’(행 2:47)에서 벌어진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다시 말해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머리로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행동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삶으로 표현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을 키워내야 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사는 미국 교회는 수적인 성장에 너무 매몰되어 왔었다. 사람들이 신앙의 결단을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교회는 이들을 성숙으로 키워가는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신경 쓰고 말하는 것은 주로 숫자다. 이른바 성공적인 목회자로 부각되고 인정받는 것은 숫자에 달려있다. 그러나 성숙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성숙은 이루기 어렵다.


때문에 우리는 자꾸 그리스도 안의 성숙보다는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는 초점을 맞춰왔다. 교회의 질과 양의 불균형 이야말로 복음주의가 세상적이 되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왜 복음주의자들이 이상 세상의 도전이 되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이 주변부취급을 당하게 되는 지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눈에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석원: 최근까지 각광을 받아왔던 ‘이머징교회’운동은 현대문화의 키라고 할 수 있는 포스터모더니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그룹이다. 그러나 당신 책이 지적하듯 교회는 그전에 던져졌던 계몽주의의 도전에도 별로 답을 내지 못하고 기술 자본, 이성에 끌려 다니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논란은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한 숙제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지 않나? (옆의 영상은 2014년에 오스 기네스와 함께한 현대문화에 대한 특강유튜브영상)


웰즈: 나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문화적 환경은 여전히 모더니즘이나 계몽주의적인 요소가 많다.

단순히 계몽주의라는 ‘철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많은 것이 새롭게 생겨났다. 원래 농업 중심이던 인류는 도시 중심으로 변했고, 일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현대화된 사회는 대량생산에 필요한 과학기술과 기계화로 나가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가 필요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고, 이제는 인터넷과 모발폰 같은 통신장비가 없이는 없다. 이 속에서 우리 모두는 철저히 ‘소비자’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상황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현대화된 사회 속에서 겪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게 되었는가? 내가 보기에는 교회가 씨름 해야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이런 것들이다.


원래 포스트모더니즘은, 특별히 이성주의를 가르치는 계몽사상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덕분에 현대 사회는 궁극적으로 맞고 틀리고를 따질 없다고 주장하고, 인간을 과거의 역사나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참다 인간성의 회복을 말할 때, 자기 맘대로의 정의를 추구하는 시대다. 바로 이런 속에서 오늘날 미국 사회는 갈등과 분쟁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김석원: ‘용기있는 기독교’에서, 당신은 진정한 교회 성장의 요소로 ‘하나님의 주권에 더 의지함’, ‘죄에 잡힌 바 된 우리의 상태를 인식함’, 그리고 ‘성령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개인의 삶 뿐 아니라 사회에까지 도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칙은 이래도 현실 속에서 이를 계속 적용해 가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 당신에게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한다면, 이 원칙을 계속 지켜 나가기 위해 어떻게 하라고 조언하겠는가?

웰스: 나도 부러지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하는 바를 실천하며 사는 것은 방법으로 표현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행동은 존재한다. 우리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읽고, 공부하고, 그 속의 진리를 내적으로 소화해 가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 뒤에는 항상 우리의 ‘존재’부터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성경 읽기나 기도 같은 거룩한 행위에 충실한 사람도 속으로는 하나님의 사람과 거리가 수도 있다. 우리 각자는 성령님께서 안의 동기, 내면의 세계를 밝히 비추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깊은 내면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길에 서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그분과 동행할 없다.


김석원: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당신은 빌리 그래함과 칼 헨리 같은 초기 복음주의자들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후 전개될 복음주의 문제의 씨앗을 뿌렸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정통기독교에 대하여 최소화된 정의 등은 이후 복음주의 운동이 초점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복음주의 운동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다 시장만능주의나 극심한 소비주의적 행태, 그리고 무절제한 물질주의적 욕구 등이 기독교 교회를 타락시키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웰즈: 최근 들어 나도 이런 생각에 더 많이 동의하고 있다. 특히 미국 사회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행태는 더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나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자라났다. 그 때문에 요즘에는 이들 지역에 학교를 짓고, 나눔의 사역을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옆의 사진 고향에 지은 학교를 방문해서 그곳 학생들과 찍은 사진: 저자제공)


 

후기


지금은 이런 비판들이 좀 더 쉽게 들리지만, 그가 자라던 시대 1950-60년대에는 서구는 엄청난 경제발전을 누리고, 부와 사치가 당연하게 느껴지던 때이기도 했다. 교회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신이 어떤 문화에 잠식되고 있는지도 모른 체, 주어진 기회를 더 활용하기에 급급했던 모양이다. 아프리카에서 오래 자리를 잡은 식민지시대 백인의 후예로, 영국유학 중에 만난 존 스토트 아래서 훈련 받고 사역자에 길에 들어선 뒤, 이후 미국 복음주의의 최절정시대를 살아온 학자로서, 그의 이야기는 ‘복음주의시대’의 명암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보여준다. 이 인터뷰가 원래 이뤄진 지 4년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그의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왜 일까?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변화된 많은 도전도 그전에 있었던 수많은 새로운 문화의 도전들과 다르지 않지 않을까? 본질에 돌아가야 답이 된다는 이 학자의 책이 이 시대에 새로운 울림이 되는 이유다.


 

이 글을 쓴 김 석원님은 하나님이 너무 내게만 박하게 대하신다고 불평이 많았던 목회자였지만, 지금은 성경신학운동을 펼치며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것의 풍요함을 맛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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