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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교양: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최종 수정일: 2021년 8월 22일

허구에 기반을 둔 인간 역사와 문명, 그 속에 들어 있는 깊은 허무주의.

인간 역사에 대한 하라리의 비전


사피엔스는 인간 문명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 지를 제시한다. 인간이 어떻게 수렵 채집인에서 출발하여 오늘날과 같은 사회와 경제를 이루고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135억년전 빅뱅으로 인해 물질, 에너지, 시공간이 생성된 뒤 (물리학), 물질과 에너지가 원자라 불리는 서로 결합된 뒤, 좀 더 복잡한 분자가 되었다.(화학) 38억년전 지구상에서 분자들이 모여 유기체라 불리는 더 복잡한 구조를 형성했고 (생물학), 7만년전에는 호모사피엔스종에 속한 생물체가, 문화라 불리우는 보다 정교한 조직을 만들었고, 이렇게 시작된 인간 문화의 발전을 “역사”라 부른다.


하라리는 역사에 3개의 중요한 혁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7만년전 시작된 인지혁명, 1만2천년전의 농업혁명, 오백년전 시작된 과학혁명이다. 그에 따르면 이 세 혁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먼저 역사의 핵심은 허구/상상이다.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허구란 국가, 돈, 종교, 인권과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 나누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 만이 가지는 이 허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마음을 모을 수 있었고, 인류에게 성공의 키를 가져다 주었다.


역설적으로 이중 하나인 과학혁명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끝내 버리는 쪽으로 간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통적인 진화론을 부정하며 인간이 세상의 도전을 극복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현대사회가 인간 불멸의 삶과 행복의 추구, 신적 위치로의 발돋움을 해 가면서, 지금까지 인간은 전혀 쓸모없게 되거나 호모사피엔스라는 종 자체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사람들이 속으로 가진 여러 질문들을 흥미롭게 답해가면서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책이 그리스도인에게 던지는 도전은 무엇일까? 내가 느끼는 동의하지 못하는 많은 내용은, 그가 상상과 허구라고 표현한 역사에 대한 시각에서 오는 것 같다. 어쨌든 방대한 내용의 책을 전문적으로 다룰 능력은 안되지만, 그가 주장하는 종교관과, 철저하게 우연적이고 무계획적인 대상으로 그리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하라리의 관점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자.


종교


하라리는 철저하게 무신론, 자연주의,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해서 이야기한다. 그에게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에 불과하다. 그는 생명현상을 오직 물리학, 화학적으로 이해하고, 세상의 실체(Reality)와 인간에 그런 좁은 관점에서만 설명한다.(환원주의) 예를들어 인간을 알고리즘으로 비교하면서, 인간도 컴퓨터처럼 조종되고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알고리즘을 변경하면 기존의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 속에서는 “인간 의식”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전제에 비추어보면, 의식이란 것 자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밤하늘을 바라볼수록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작은 지를 절감한다. 관측가능한 우주에는 1,700억 개 이상의 은하계가 있고, 각각의 은하는 최소 1,000만 개에서 최대 100조 개의 별(항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은하는 우리 은하계로부터 수백만에서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고, ​더 놀라운 것은 오늘도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다. 과학과 이성이 힘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질서를 배우고 알아가는 도구와 과정일 뿐이다. 과학 뒤에 숨어 외치는 인간의 오만함과 좁은 시각이 오버랩된다.


그러나 하라리에게 귀를 기울일 점도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인간이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다른 지식을 보다 역동적이고 유연하고 탐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자세는 성경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는 중심에 성경을 두고, 이 말씀을 음미하면 하나님을 더욱 발견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종종 말씀에 더 깊게 들어가고픈 욕구와 문자적인 의미 사이 속에서 갈등할 때가 있다.

여기서 개인은 더 열린 탐구정신을 갖고, 교회는 이를 도와 하나님과 말씀을 대한다면 좋지 않을까?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말씀을 먹으라”는 말이 이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기독교는 형식보다는 관계를 더 강조하는 종교다. 내 믿음과 이웃과의 관계는 여기서 띄어 생각할 수도는 없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품고, 이웃과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증거하며, 예수의 삶을 살아내기 원한다면, ‘구별’되는 모습은 좀 더 유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세상과 함께하면서도 구별된 마음이 필요하다. 하라리가 “종교는 종종 차별, 의견 불일치 그리고 불화의 원천”이라고 공격하는 빌미를 우리가 만들고 있지 아닌가? 이러한 모습은, 16-7세기의 카톨릭-개신교간의 종교전쟁뿐 아니라, 그 전후에도 사소한 교리차리로 죽어간 수많은 희생양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복음의 본질 보다는, 사소한 차이에 자신을 적대로 굽히지 않는 정통교회의 모습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바리새인들과 겹쳐진다.


행복의 조건

하라리는 한 인터뷰에서 행복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사피엔스' 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인류는 지난 5백년 간의 과학과 산업혁명을 통하여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과연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행복은 쾌락과는 다른 것이며, 부나 건강, 가족과 공동체같은 객관적 조건보다는, 그런 객관적 조건과 자기안의 주관적 기대가 만나 결정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인간에게 행복은 분명히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고, 도리어 삶을 전체적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생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어떤 식의 의미부여도 자기기만으로 폄하한다. 다시 말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정말 가치가 아니라, 자신과 인생 무상의 깨달음에 있다는 뜻이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애굽에 가서 노예로 신음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라는 하나님께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무어라 말하리까하고 묻는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 라고 대답하신다. 답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준로 놓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해 보라”는 도전을 경험한다. 우주와 인류, 모든 피조세계를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그 분을 기준으로 삼는 것, 그렇게 되면 나는 그 분의 아들, 핏 값으로 주고사신 예수의 형제자매, 지음 받은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그 분의 분신, 태초전부터 예정 속에서 시공간의 삶을 넘어서도 영원히 함께 할 동반자, 힘든 삶 속에서도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그 분의 자녀가 된다.


이러한 정의는 “나” 만의 정의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독립적 개체로서의 나 자신이 아닌, 통칭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이다.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며, 그런 우리의 인생이 선택받은 자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의미있는 삶이란?


결론적으로 하라리는 의외로 겸손한 자세로 마무리한다. 인류가 여전히 행복과 고통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 과거 수 만 년 전과 마찬가지로 무지하며, 이제 불과 수년전부터 행복의 역사에 대해서 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초기에서의 가설및 적절한 연구방법에 대한 조사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라리는 가능한 많은 연구방법을 아는것과 그리고 올바른 질문들을 던지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라리의 책을 보면서 우리 역시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올바른 정의도 필요하다. 행복의 정의를 한마디로 하기는 쉽지 않지만, 신자는 궁극적으로 행복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그것은 하나님께 복 받은 삶이며, 의미있는 삶이며 또한 천국의 삶, 다른 말로 “샬롬”의 삶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평화”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샬롬은, 이 뜻이외에도 온전함, 완전함, 온건함, 조화로움, 정의, 건강, 안전, 번영 등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샬롬은 어떤 정치적 혹은 이념적 가능성이 아니고, 인간이 부단히 노력하도록 영감을 주는 비전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우리는 단지 그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는 또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 그 샬롬을 통해 우리는 바야흐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 회복된다.

하라리의 책속에 담긴 깊은 허무주의는 도리어 우리의 행복이 하나님께 있음으로 인해 더 깊은 만족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서의 팔복은 누가 복있는 사람인지를 말하는데 그러한 이들의 삶이 “의미있는 인생”이 된다. 그 말씀은 복의 조건이자 우리에게 던져진 사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은 인간이 머리속으로 만든 ‘허구’의 상상력이 아닌, 실제로 접촉하고 사랑하고 같이 나누며 자라는 이웃들을 통해 드러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행복이란 역설적이게도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서 발견된다.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며 그것이 우선되는 삶이다. 가만히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그저 ”나”만을 위해 살다보니 세상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게 아니겠는가?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사는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라리가 들으면 “자기기만”이나 “허구”라고 말하겠지만 말이다.


이웅열 리뷰어는 아들레이드의 평화로운 하늘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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