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고해(苦海)다”라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책은 시작된다. 저자 스캇 펙은 인생이 본래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며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정신적,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이는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에 대한 헌신, 균형잡기 등 적절한 훈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알려준다.
이러한 성장은 사실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에 역행하는 특별한 것인데 그는 이를 가능케 하는 힘이 ‘사랑’임을 강조한다. 스캇 펙은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하고 성적이거나 육체적인 것, 사랑에 빠지거나 상대방에게 의존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님을 가르쳐 줌으로써 진정한 사랑이 더욱 귀해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안겨준다.
부모의 양육태도가 자녀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은, 지금은 진부하게 보여도, 이 책이 40여년 전의 상식이 비추어보면, 일반인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심리학적 혜안을 매우 잘 설명했던 시대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이러한 과정을 이끄신다고 보고 우리의 무의식, 그 중에서도 융의 집단 무의식이 바로 하나님이고 개인 무의식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지점이며 이런 무의식이 악몽이나 불안, 우울 등 여러 증상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데 여기에 적절히 반응하지 않을 때 우리가 정신적으로 병들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양육하시는 목적, 즉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가 정신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1:4)”는 성경구절이 생각나게 한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향상과 영적 성장을 위해 평생동안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스캇펙에 따르면 우리가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장하면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확장되어 결국 하나님의 정신과 결합하고 교감하는 궁극의 경지에 이르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동참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은총과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의 경지로 인도하여 인류 전체의 진보수준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신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는데 저자는 그 가장 큰 이유를 게으름이라고 본다. 그는 게으름이 변화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성장을 위한 노력을 회피하게 하며, 이런 게으름이 바로 원죄이고 악이며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설명한다. 또 자유와 권리는 원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책임과 자기 훈육은 거부하는 태도도 지적하며 우리가 이런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평생동안 부단히 노력하여 정신적, 영적 성장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많은 유익이 있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들도 엿보인다.
첫째, 오래 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정신의학 이론이 과거 수준에 머물러있다. 특히 정신과 약물치료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 SSRI계열의 항우울제가 개발되기 약 10여년전 쓰여졌고 저자가 정신분석 전문가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인 요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그동안 효과적이고 다양한 정신과 약물의 개발, 뇌영상검사와 뇌과학의 발전 등으로 유전, 뇌 신경회로의 문제, 신경전달물질 등 생물학적 요인이 정신건강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심리학적으로도 부모의 양육태도 이외에 그 사람의 타고난 성격과 기질, 경제적, 사회적 환경, 다른 대인관계나 경험 등도 중요한데 정신건강 문제의 원인에 있어서 부모의 양육방식만을 강조하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둘째, 영적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은혜’와 ‘하나님’을 언급하기 때문에 언뜻 기독교 서적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않은 부분들이 엿보인다. 이는 스캇 펙이 이 책을 쓸 당시 불교 신자였고 나중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이 기독교 서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하여 기독교 관련 내용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무의식과 동일시하거나 에너지나 힘처럼 묘사하는 등의 모습을 볼 때엔 저자가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벗어난 고통과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한 기쁨은 하나다.”라는 문장은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 구원의 대속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원죄를 ‘게으름’으로 설명하는 것은 참신하긴 하지만 이는 당시 불교도였던 저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인 자기 훈육과 부단한 노력의 반대 개념으로 보인다. 기독교적으로 원죄는 게으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다.
아마도 그는 불교도로서 매우 많이 고민하고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면서 해탈(불교의 구원)에 이르려고 했으나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을 깨닫고 이를 ‘은총’이라고 부르며 묵상하여 점점 하나님의 존재를 찾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가야할 길’은 ‘한 정신과의사가 불교에서 기독교로 아직도 가야할 길’ 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하나님을 자신의 지식과 경험, 자기 안의 무의식 등에서 찾으려고 애썼는데, 우리는 그런 노력이 가지는 분명한 한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된 존재이고, 인식의 범위나 경험에도 한계가 있다. 각자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특징이나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게 된다. 그리고 이를 전체로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을 왜곡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성경이 중요하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내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성경을 통해서만이 나보다 크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야할 길’은, 바쁜 일상 속에서 물질적 풍요와 주관적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므로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하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정신적,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함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수많은 실패와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온전한 영적 성숙을 향해 부단히 노력해 나가는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고 격려해주는 좋은 책이다.
이창일 리뷰어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