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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editor

역사를 즐겨라: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리뷰/ 잃어버린 기독교를 찾아서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바울을 비롯한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서방으로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에데사(Edessa)와 니시비스(Nisibis)를 거쳐 동방으로도 전파되었다. 바르다이산(Bardaisan)이 기록한『국가들의 법들의 책』(Book of the Laws of the Countries)에 따르면, 3세기 초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페르시아를 비롯한 파르티아(Parthia), 메데나(Medina), 쿠샨(Kushan, 현재의 아프카니스칸 지역)까지 펴져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가 동방으로 전파되었지만 우리들은 그들에게 대해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는 한국 교회와 신학교가 유럽-미국중심의 기독교만을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자리에서 소개할 김호동 교수의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은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역사학자이자 신앙인이 저자가 그 동안 우리 기독교사에서‘잊혀진’동방기독교인들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그들의 삶이 중앙아시아와 중국 문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치밀하게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1장은 이슬람이 동-지중해를 잠식해가고 있던 12세기 당시에 중세 유럽을 풍미하였던 ‘사제왕 요한(Prester John)’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사제왕 요한이 누구였던가? 그는 중세 유럽인들이 동방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였던 전설속에 나오는 기독교 왕국의 통치자였다. 사실, 그에 대한 전설은 12세기 오토 폰 프라이징 (Otto von Friesing)의 『두 도성』(Chronica de Duabus Civitatibus)에서 시작되었다.

그 책에 따르면,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지역 넘어 있는 극동 지방에 사제왕 요한이라는 왕이 있는데, 그는 동방박사의 후예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왕이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오직 에메랄드로 만든 홀만을 사용할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렇게 『두 도성』에서 동방에 있는 사제왕 요한이 소개된 이후로, 그에 대한 전설은 확장 증폭되면서 중세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널리 유포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아마도 당시 지중해까지 세력의 확장하였던 이슬람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세력에 대한 소망과 더불어 당시 중앙아시아를 너머서 중국에까지 기독교를 믿는 이들에 대한 소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장에서 동방 어딘가 있을 사제왕 요한에 대한 전설을 다루었다면, 2장~ 4장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동방으로 전파되는 과정과 그곳에서 성장발전 및 소멸을 다루었다.


2장에서는 저자 김호동은 여타의 역사학자들처럼 에페소스 공의회(A.D. 431)에서 네스토리오스(Nestorios)가 교회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단으로 정죄될 수 밖에 없었던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연이어 그는 네스토리오스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셀루키아-크테시폰에 네스토리오스교단을 세운 후, 중앙아시아를 넘어 몽골초원과 중국 서안까지 진출하는 과정도 세밀하게 추적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김호동이 말한 것처럼, 셀루키아-크테시폰에 교단을 세우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까지 넘어간 이들을 ‘네스토리오스교도’라고 지칭하는 것은 수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페르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를 향한 이들은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시리아공동체였는데, 그들은 네스토리오스의 교리를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근 학계에서는 이들을 “동방교회” 혹은 “동방기독교”라고 부를 것을 권장하고 있다.


3장에서는 동방으로 전파된 기독교가 몽골초원에서 어떻게 정착하며, 몽골제국 아래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다루고 있다. 특히 이번 장에서 책의 저자는 중앙아시아 연구자답게 동서양의 다양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투르크, 위구르 유목민을 비롯하여 몽골의 부족의 기원, 개종과정, 종교정책 등을 잘 정리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3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3세기 칭기스칸의 며느리로 이후 몽골제국의 황후가 되었던 ‘소르칵타니 베키(Sorghaghtani Beki)’였다.

칭기스칸이 케레이트 부족을 점령한 후, 그는 케레이트 부족장의 딸이었던 소르칵타니 베키를 자신의 막내 아들(툴루이)의 부인으로 삼았다. 그녀는 이미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그녀는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첫째인 뭉케와 둘째인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4대와 5대 칸이 되었고, 셋째인 훌라구는 몽골제국의 서아시아 지역을 감당하였던 일 칸을 세웠던 훌라구였다.

뭉케를 비롯한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어머니인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뿐 아니라, 그는 우리나라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그녀의 손녀인 홀도로게리미실(쿠빌라이의 딸)이 고려의 충렬왕과 혼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는 1252년 생을 마감하였는데, 사후에도 몽골제국에서 성녀로 추앙 받게 된다.

마지막 4장에서는 일 칸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에서 사라져가는 동방기독교에 대해서 다룬다. 먼저 4장은 그 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야흐발라하 3세전』를 바탕으로 일 칸국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동방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였다. 사실, 이 문헌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13세기 몽골출신의 기독교 수도사였던 랍반 사우마(Rabban Sauma)와 그의 제자인 마르코스(Markos, 이후 마르 야흐발라하 3세가 됨)가 베이징을 출발해 실크로드를 따라서 페르시아 일대와 유럽을 방문하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후반부는 랍반 사우마의 유럽 방문 이후 14세기 초반의 일 칸국의 동방 기독교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는데,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4장 앞부분은 은 이 문헌의 전반부를 중심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4장의 뒷부분에서는 한문자료를 바탕으로 중국과 몽골초원에서 번성하였던 동방기독교의 마지막을 간략히 다루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16세기에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동방기독교가 실크로드를 따라서 아시아에 널리 펴져있었다. 하지만, 이런 동방기독교의 역사는 일반적인 교회사 책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현재 기독교를 보통은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로 구분하는데, 이제까지 다룬 동방기독교는 그 어떤 범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기존의 교회사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이 네 번째 그룹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럽중심의 교회사를 넘어서서 그 주변에 함께 존재하였던 교회들의 역사를 볼 때, 기존의 교회사를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형근 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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